열혈공대햏자 [7996] · 쪽지

2004-08-28 20: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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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 생활<1편> - \'나는 수능을 통해 세상에 대해 배운다\'후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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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닉네임 \'신촌연대햏자\'입니다. 수기 끝나고 닉네임을 바꿨습니다. 앞으로 올릴 글은 예전에 올린 수기(자서전)의 속편으로서 대학 입학 이후의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4년 동안 수능을 통해 세상에 대해 배우는 과정에서,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게 된 저에게 있어서,  이 이야기는 예전 수기(자서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배운 것들을 대학에서 활용하는 방식에 관해 나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1학기가 지나고 2학기 개강을 앞둔 현재로서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번 글을 통해 앞으로 대학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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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새로 배움터 중에 한양대생들을 보며 했던 생각..

\'이들과 함께 더 발전된 나로 거듭날 수 있을까.....\'



\'함께\' 라는 말 속에는 그 동안 혼자였기 때문에, 이제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고 싶다는 것을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 잃어버린 사람들.. 가공할 만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 참신하고 유동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 내가 생각하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사람들..
특히 나보다 앞서서 학교 생활을 겪어 보고, 나름대로의 깨우침을 지닌 선배들에 대한 만남을 누구보다도 갈구했으며, 이는 선배들에 대한 외경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공과대학의 성별비율을 익히 알려져 있지만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여성집단에 비해 남성 집단의 단합이 잘 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른바 \'공대 분위기\'는 나에게는 잘 맞았다. 새터 당시 공과대학의 각 학부별로 펼쳤던, 마치 군악대를 연상하게 하는 파워가 넘치는 응원은 한양공대에 대한 애착심을 갖는데 기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새터 당시 내가 들어가게 된 조에는 소위 \'자기 목소리 낼 줄 아는\' 동기들이 많았다. 어떤 모임을 이끌고, main을 추구하고, 일을 주도하는 나에게 있어, 매우 묘한 경험이였다. 장기자랑 당시 거의 내 의견은 포함되지 않고도, 학부 내 1등을 하고, 전체 공과대학 장기자랑에서도 가장 히트를 치며 수상한 조가 되었다. 마치 학부의 평범한 구성원으로 남을 것이라는 예고라는 듯이...


새터 당시 같은 조에서 만난 선배들은 공부도 하며, 자기 가치관도 확실하고, 어느 정도 놀 줄도 아는 바로 내가 원하는 선배들이였으며, 그들과 앞으로 맺어질 두터운 친분에 대한 기대감을 주었다. 새터를 가기 전에 학부에 적응하기 위한 방법으로 3수생이지만 나이를 속이는 방법을 생각했다. 3수생이라고 하면 대다수의 현역(85년생)동기, 현역03(84년생)선배들이 처음에 거리감을 느껴 접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내가 적응을 하는 데 있어서 치명적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어려 보이는 외모를 이용해서 새터 내내 재수생이라고 속였으며, 다른 조에겐 장난으로 87년생 검정고시 응시생이라고 말했는데, 우습게도 이는 몇몇 동기들이 입학 후 며칠이 지날 때까지 정말 그 것을 사실로 믿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처음에 말을 놓았던 현역동기들과, 재수동기들은 내가 3수생임이 알려지자, 어떻게 할 줄 몰라 했다. 나이가 그렇게 중요한 것 아니며, 적당한 예의만 갖추면 되고, 친구에 대한 부족함을 호소한 나로선 재수동기들과는 친구처럼 지내는 방식을 택하였고, 나한테는 말과 호칭 모두 놓는 것을 권장했다. 아직 제대로 판단이 안 선 현역동기들은 나한테는 애매한 위치를 취하였고, 그래서 호칭문제에 관한 글을 학부 까페에 올리자, 이 문제는 학부 내에서 커다란 파장을 가져오게 한다. 3월 말 정도 되자, 더 이상 호칭문제로 갈등하고 싶지 않았으며, 서로 편한대로 지내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했으며, 결국 현역중에도 형, 오빠라고 부르고 반말하는 동기, 친구처럼 지내는 동기, 재수중에도 형이라고 부르는 동기, 친구처럼 지내는 동기등 매우 다양해진다.




\'유용한 기술을 발명해서 기술 발전에 큰 공헌을 하여, 여러 사람을 살려보고자 한양공대에 들어 온 것은 아닙니다. 현재 공대를 선택하는 다수의 수험생도 마찬가지이니 말입니다. 현실적인 부분도 많았고, 이 것을 후회하진 않습니다. 저는 선배들을 만나러 한양공대에 왔습니다. 학생회에 지원하는 이유는 학부내의 행정과 안건들에 대해 세세한 사항들을 다루는 곳이 바로 학생회이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방관하며 불평하고 하는 것보다, 직접 그 현장에 뛰쳐 들어서 주도해나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학교 입학 초기 나는 패기로 가득 찬 신입생이였으며, 과도한 웃음을 짓기도 하며, 여러 집단에 적응을 하려고 노력 했다. 처음 보는 동기들에게 항상 말을 먼저 건네는 것은 나였으며, 우리 반말고 다른 반에도 아는 사람이 꽤 생기게 되었다. 한편, 먼저 다가오기 어려운 03선배들에게는 저(低)자세를 취했으며, 장난도 쳐가며 편하게 접근해 나갔다.


3월 초에 학부 내에서 소모임(학회)를 모집했는데, 내가 지원한 곳은 영어학습 관련 소모임인데, 철저한 면접에 의해 뽑는 거의 소수 엘리트 집단이였다. 지원 이유는 고학번들이 그 소모임을 지배적으로 운영하고 있었고, 그 사람들이라면 내가 배울 것이 충분히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5대1의 경쟁률을 낳은 이 학회에 탈락하면서, 대학 입학 처음으로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동아리는 대학 생활중에 활동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졸업 후에도 남아서, 자신이 대학교를 다시 찾을 때 같은 동아리 출신이란 이유만으로 선후배간의 친목이 생기는 곳이다. 동아리는 내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곳 이였으며, 동아리 가두모집 당시 혼자 여기저기 알아보며 선배들의 설명도 듣고, 일단 두 개의 동아리에 가입했다. 경제 동아리와 영어 동아리였는데, 경제 동아리는 내가 관심을 갖게 된 분야인 경제학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는 것이며, 역시 고학번 및 인문계학생쪽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을 보고, 그들로부터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서 였다. 영어 동아리는 필수인 어학실력을 향상시켜보고자 하는 것도 있었지만, 동아리 학습 부장 선배의 동아리에 대한 설명이 매우 명쾌하였으며, 선배에 대한 경외감을 가진 나로선 존경스러웠던 그 한 사람을 보고 동아리에 들어가게 된다.


과 동기들의 입학성적은 의외로 매우 다양했다. 정시생 기준으로 생각했던 나와는 달리, 1,2학기 수시로 인해 수능 응시를 안 한 학생도 상당했으며, 1학기 수시합격자들의 그 동안의 생활은 가지 각색이였다. 해외로 나가서 견문을 쌓고 온 사람도 있는가하면, 대충 고등학교다니며 놀다가 온 동기도 있었다. 1, 2 학기 수시합격생들은 정시생들에 비해 미리 다듬어진 정을 가지고 있었고, 선배들과 친분 역시 그러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인맥부터 밀리고 들어간다는 생각에 정시생에게 소외감을 주게 했다. 동기들의 수능 성적은 4등급부터 수리 과학 만점까지 매우 다양하였는데, 수시합격생들이 장난으로 친 수능 성적을 들은 순간... 쓴 웃음이 지어졌다. 한양공대는 수리, 과학, 외국어 만을 반영하는 전형을 써서, 학생중에는 언어 사회를 모두 버린 학생이 판을 쳤다.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였다. 고등학생이라면 알아야할 기초 국사나 사회지식이 결여되어 있는 동기들이 한 둘이 아니였으며, 특정영역 반영의 폐해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공대를 지망해서 온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평소보다 점수가 떨어져서 왔거나, 다른 군의 약대에 떨어져서, 또는 수시를 썼는데 합격해버려서 어쩔 수 없이..등 매우 다양했다. 그러면서도 정말 공대를 지망해서 왔는데 특이한 사고를 하고 과학자와 비슷한 싸이니컬하지만 참신한 발상을 지닌 몇몇 동기는 내게 미소를 머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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