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기차 [477377] · MS 2013 (수정됨) · 쪽지

2018-05-30 17:2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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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이 아닌 날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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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힐끗,

 

 

방에서 거실로 나가다보면 

 

 

식탁 위에 아침이면 하나씩 올라와있는

 


어머니의 사랑.

 


사실은, 친할머니의 사랑에

 


어머니의 사랑이 더해진 것이라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홍삼이라고 부른다.

 


포도즙처럼 팩형으로 되어있는 홍삼.


 


2.

 

오늘도, 

 


딱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네 개의 모난 부분 중 하나라는 이유로

 


한 쪽 귀퉁이를 가위로 자른다.

 


쭈욱~ 들이킨다.

 


쪼옥~ 빨아들인다.

 


후우! 바람을 불어넣는 순간,

 



3.

 

선생님도 재수하셨나요?

 


네, 재수했어요.

 


힘들 땐 어떻게 하셨나요?

 


힘들 때 쉴 수 있는 어떤 것을 정해놓으면

 


몸이 안 힘들어도 될 때 힘들어 하더라구요.

 


그래서.. 조금 독하지만 힘들 때도 그냥 공부했답니다.

 


그러면 몸이 

 

 

‘얘는 내가 힘들다 해도 그냥 하는구나’해서 

 


안 힘들어 했어요.

 


매번 느끼는 거지만

 


배울 점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존경합니다.

 


아직 부족한 사람입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4.

 

순간, 열흘 정도 된 일이 떠올랐다.

 


내 말대로, 부족한 사람이 

 


부족한 조언을 하고 말았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질문에 정확히 부합하는 대답이었다.

 


“어떻게 해야하나요?”가 아닌

 


“어떻게 하셨나요?”였기에.

 


하지만, ‘어떻게 해야하나요?’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으면 어떨까?

 


“존경합니다”라는 나에게 과분한 말을 듣고

 


그 과분함을 즐기고 만 것은 아닐까?


 


5.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

 


그곳에 있으면 소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소만 아는 그 자리를 스페인어로

 


퀘렌시아(Querencia)라고 부른다.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이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중-


 


6.

 

재수 시절, 나는 

 


나만의 퀘렌시아를 가지고 있었다.

 

 

아침마다 어떤 구절을 프스트잇에 써서

 

 

겹겹히 쌓아 올리는 것, 

 

 

매일 2교시 후

 


건물 앞에 나와 간식을 먹는 것,

 


점심, 저녁시간에는 줄넘기를 하고,

 


건물 주위를 도는 것,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간들이다.

 


아침마다 계획표에 적는 것만으로도

 


나를 충전시켜주었던 시간들이다.

 


그래서 나는 1년간 산속에 갇혀

 


매일 10시간 이상씩 공부하는 시간들이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견뎌냈던 그곳은,

 

 

나의 작은 퀘렌시아들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큰 퀘렌시아였을지도.. 

 

 


7.

 

선생님도 재수하셨나요?

 


네, 재수했어요.

 


힘들 땐 어떻게 하셨나요?

 


많이 힘들죠?

 


그럴 수 있어요.

 


견디지 못할 힘든 때가 오기 전에

 


자신에게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게 어떨까요? 

 


저는 매일 하루 중간 중간에 

 


그런 시간들이 있었어요.

 


할 일로 가득한 시간표들 사이에

 

 

마음에 드는 구절 따라 적기. 

 


화장실 다녀오기.

 


간식 먹기.

 


운동하기.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소한 것 같지만

 


그런 계획이 적혀있어 힘이 났어요.

 


이렇게 한 번 해보실래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너무 힘들 땐, 

 

 

잠시 숨을 내뱉어요.

 

 

한숨이 아닌 날숨을요.

 


 


매번 느끼는 거지만

 


배울 점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존경합니다.

 


아직 부족한 사람입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8.

 

오늘도, 

 


딱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네 개의 모난 부분 중 하나라는 이유로

 


한 쪽 귀퉁이를 가위로 자른다.

 


쭈욱~ 들이킨다.

 


쪼옥~ 빨아들인다.

 


아직 조금 남았다.

 


그런데 아무리 빨아들여도 

 


완전히 공기가 빠진 팩에서는



잔여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내가 원하면 원할수록 

 


나만 숨이 막힌다. 그러다, 

 


후우! 바람을 불어넣는 순간,

 


쪼르르

 


깔끔하게 내 입에 흘러들어온다.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안녕하세요. 바나나기차입니다.

 


6평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어떻게 지내시는가요?

 


1년에 한 번, 제 페북에 이런 글이 올라옵니다.

 

 


“공부가 안 되니 공부나 해야겠다.”

 

 


허세도 이런 허세가 없죠.

 


네, 제가 고3 시절에 쓴 글인데

 


‘몇 년 전 오늘’이라는 명목으로

 


자꾸 저를 괴롭히네요. 

 


공부한다던 놈이 왜 페북을 켜서

 


굳이 저런 글을 남겼는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재수를 했을 수도 있겠군요.)

 


고3 때는 말로만 그랬는데,

 


재수 때는 정말 온몸으로 실천했어요.

 


정신이 제 몸을 지배했던 때이죠.

 


저는 제가 그 시절 정말 극한의 상황에서

 


극한의 힘듦을 겪어냈다고 생각하며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는데

 


알고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네요.


 

 


여러분들은 혹시

 


여러분들의 힘들어 하는 모습을

 


정신력의 부족,

 


나약함 또는 나태함이라고만 생각해

 


자책하고, 괴로워하며

 


한숨을 내뱉고 있지는 않나요?

 


만약 그렇다면 한숨 대신에

 


매일 하루 중간 중간

 


날숨을 내뱉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넣어보는 것은 어떤가요?

 


나만의 퀘렌시아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공기가 다 빠져 숨 막히는 여러분의 일상에

 


한숨이 아닌 날숨 한 번 내뱉는 건 어떨까요?

 

 

 

가끔 그런 시간 가질 수 있게,

 

 

반듯한 생각이 담긴 글로 찾아뵐게요.

 

 

그러지 못할 때에는

 

 

멀리서라도 조용히 응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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