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minum [487666] · MS 2014 · 쪽지

2019-01-22 01: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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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학벌이라는 껍데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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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종 교수가 쓴 에서 그가 아주대학교 출신 의사였기 때문에 욕을 들어먹고, 비웃음을 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의협에서나 정부부처에서나 그가 서울 근교에 있지만, 여전히 지방사립대인 아주대학교 대학 병원에서 일하기 때문에 당했던 일들이 열손가락, 열발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나온다. 그게 자격지심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그랬기 때문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학벌이란,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 내가 지난 30여년 동안 겪은 몇 가지 일에 비추어보면 말이다. 


1. 대학에 입학해서 겪은 일이다. 교수 중 한분은 "우리학교는"이라는 말을 자주 입에 담았다. 그런데 그 우리학교가 자신이 나온 "서울대학교"를 의미하는 걸 알았을 때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가르치는 수준을 아주 낮춰서 가르쳤는데, 그땐 그게 수준 낮은 것인줄 전혀 몰랐다. 난 나중에 전자기학 공부를 다시 하면서 그렇게 낮은 수준으로 배우면 양자역학을 배우거나 그 윗 과정을 배울 때 혼자서 전자기학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혼자서 역학, 전자기학, 양자역학을 다시 다 공부해야만 했다. 뭐, 어차피 공부란 혼자서 해야 하는 거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불만이 없다. 이 덕에 지금 내가 강의할 땐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애쓴다.


2. 대학원 다닐 때 일이다. 지도교수께서 내게 그 당시 한참 유행하던 스컴 모형을 이용해 핵자의 성질를 연구하라고 했다. 지도교수는 저에너지 핵물리를 하신 분이었지만, 강입자물리에 관심이 있어 내게 스컴 모형을 한번 공부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세미나를 하면서 모형을 어느 정도 익힌 다음에는 서울대 핵물리이론 그룹에 가서 같이 세미나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외부 초청인사가 와서 세미나를 했는데, 그분을 소개하면서 "학부는 당연히 서울대를 나오셨고..."라고 말하는 거였다. 나는 그 "당연히"라는 말에 귀가 거슬렸다. 뭐랄까, 묘한 반감 같은 거라고나 할까? '왜, 물리는 꼭 서울대 나와야만 할 수 있는 거야?'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그땐 그랬다. 뭐, 열등감이 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열등감과는 거리가 멀다고 늘 생각했지만 말이다. 


3. 그리고 한참 후, 독일에서 박사를 한 뒤, 독일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느라 내 출신 성분을 완전히 망각하고 살았는데, 부산대에 교수가 되었다. 출신 성분을 그다지 따지지 않았던 그 당시 부산대 물리학과를 여전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교수가 된 후, 몇 주 지나서 내가 들은 말이다.

"인하대 출신이 어디 한번 잘 하나 봅시다."

아, 그렇구나. 난 인하대를 나온 사람이었구나, 각인시켜 주는 말이었다.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그냥 난 피식 웃고 말았다. 


서울대를 포함한 SKY나 명문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좋았던 건 나빴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I. 50이 넘어 명문 리그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만큼 날 자유롭게 해주는 건 없었다. 그 어디에 속할 필요도 없다는 것. 참고로 난 내가 나온 인하대 동문이나 상문고등학교 동문이나 그런 동문이라는 것을 참 우스운 것이라고 여긴다. 그저  친목회 정도라면, 나가지만, 그걸 벗어나면, 나는 발을 끊는다. 그딴 건 자유롭게 사는 걸 방해할 뿐이다. 특히나 끼리끼리로 가면, 그땐 쓰레기 수준이 되는 거다.


II. 난 학생들을 대할 때 한번도 그들이 고등학교 때나 학부 떄 이뤄놓은 걸로 대한 적이 없다. 아무 선입견 없이 그에게도 언젠가는 터져나올지 모르는 잠재력이 있다는 걸 늘 전제로 학생들을 대했다. 그리고 그 학생들 대부분 대학원에서 잘해 냈다. 그중에 한 명은 교수도 되었고, 외국 연구소에 종신직 스태프도 되었다. 물론 개중에는 게으름 때문에 사그라든 친구들도 있었다. 그건 게으름 때문이었지, 그가 이 잠재력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부지런함도 능력이라면, 능력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III. 난 학벌 때문에 교만할 이유가 없었다. 학생들에게도 자주 말하지만, 교만과 열등감은 샴 쌍둥이다. 내가 명문대를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열등감이 있다면, 신입생 수능 성적 기준으로 내가 나온 대학보다 못한 학교를 나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오만하게 대할 것이다. 그런데 그딴 건 다 쓸 데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결론은 이렇다. 학벌은 그냥 껍데기일 뿐이다. 그 껍데기만 보면, 한 인간이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고통이 있었는지, 어떤 번민과 고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인생을 풍부하게 사는 건,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껍데기만 보는 사람은 한 사람이 왜 소중한지 모른다. 그러니 그런 자들은 얼마나 많이 공부했느냐와는 상관 없이 그 자신이 껍데기일 뿐이고, 속물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어리석은 자들인 것이다. 이런 모든 것에서 놓여나면 인생이 참 자유롭다는 걸 알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국종 교수의 를 읽고 느낀 점이다.


하나 더: 빠진 게 하나 있다. 난 독일 본대학교에서 박사를 3년 만에 한 뒤, 보훔대학교에서 연구원 생활을 했다. 그때 유학생들은 모두 내가 서울대 나온 줄 알았다는 게 내 집사람 말이었다. 이 또한 사람 기분 묘하게 만들었다. 왜, 꼭 서울대 나와야 박사를 3년 만에 하고, 독일에서 연구원 생활을 할 수 있나? 그때도 내 속은 여전히 연구를 잘 못해서 허덕이며 살 때였는데 말이다. 학벌만 보면, 상대방 마음 속은 전혀 안 보인다.


하나 더 더: 난 부산대에 십 년 있다가 인하대로 옮겼다. 그건 모교라서 옮긴 게 아니라 오로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 인천에 남아 생활하시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결국 재작년에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이제 난 어디든 다시 갈 수 있다.


출처: 인하대학교 물리학과 김형철 교수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1649166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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