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기차 [477377] · MS 2013 (수정됨) · 쪽지

2019-02-16 17: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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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 대리수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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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맘 편히 앉아 있지 못하고,


친척들이 물어보는 질문들에 상처받고,


동갑내기 사촌의 합격 소식에,


주위 눈치만 봤던 학생들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 자리에 앉아있던 학생들 중에는


다시 한 번 해보려는데, 


공부해야하는데,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친척집에 끌려간 학생들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려 하니


주위에서 들려오는 추가 합격 소식들.


친한 친구의 합격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복잡한 감정이 밀려오는 하루 하루를 보내는


그런 학생들도 있겠죠.




인생의 한 번 뿐인 고등학교 졸업식.


갈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갔더니

 

양손 가득 꽃다발을 들고


가족들, 친구들, 선생님들과 해맑은 얼굴로 


사진을 찍는 친구들을 바라보기만..


그러다 사진을 찍자는 친구의 부탁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고,


쓰라린 가슴을 움켜잡고 터덜터덜


부모님차에 올라탄 학생들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런 와중에도


마음을 다 잡고 열심히 해보려 하지만,


‘다시 시작하는 것이 맞을까’ 고민되고


‘잘 할 수 있을까’라는 막막한 생각이 들고


‘실패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찾아오는


그런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이 있어요.




그런 학생들을 위해 글 하나 남길게요.


저에겐 아직도 지우지 못한 마음 아픈 기억이 있거든요.


대리 수상에 관한 이야기에요.


4년이 지났을 때 처음으로 남들에게 말할 수 있었던


6년이 지난 지금은 그래도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그 전에는 생각만으로도 힘들었던 그런 이야기요.


다시 시작하는 그 발걸음에


부디 자그마한 힘이라도 되었으면 해요.





2013년 2월. 시끌벅적한 강당.


1층엔 오늘의 주인공인 3학년 학생들이


선생님들의 지도에도 불구하고 


3년간 자신들을 괴롭힌 것을 복수한다는 듯이


마냥 신나서 떠들고 있다.


하나같이 짧은 머리였던 친구들이 


파마와 염색을 하고 오니 


서로의 낯설음에 더 시끄럽다.


뒤이어 방송에 따라 입장하는 1, 2학년 후배들.


그런 우리를 구경이나 하듯 


2층에서 내려다보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다.


강당의 구조 때문일까. 


마치 검투사를 구경하는 콜로세움의 관객들 같다.



그렇다. 오늘은 졸업식이다.



담임 선생님, 부장 선생님을 비롯한 교감, 교장 선생님과


1~2학년 후배들, 그리고 졸업을 하는 3학년들,


이때다 싶어 참여한 듯한 처음 보는 구의원까지 다 모이자


부장 선생님께서 리허설을 안내하며


조금만 조용히 해 달라 부탁한다.


평소 같았으면, 아마 고함부터 질렀을 테다.


식의 순서를 알려주고 리허설을 시작하려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급히 내게 다가오신다.


1년간 믿어주고 응원해준 선생님의 기대에


한참을 못 미쳤다는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떨구고 있는 내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다.




“K야, 


지금 P가 OT에 참석하러 서울에 갔다 오는 길인데 


차가 막혀서 좀 늦는다는구나. 


너가 대신 앞에 나가서 상을 받아줘야겠다.”




반에서는 1, 2등을, 전교에서도 상위권을 다투던 나와 P.


P는 수시로 연세대에 합격하였고,


정시에 올인한 나는 졸업식 다음날인 바로 내일


재수기숙학원에 입소하기로 예정되어있다.


이런 상황에 내게 이런 부탁을 하시다니..


하지만 얼마나 급하면 이러실까 라는 생각과


졸업식 진행이 바빠 미처 고려하지 못하셨을 거란 생각에


언제 나가면 되냐 묻는다.


거절을 잘 하지 못했던 성격도 한 몫 했다.


선생님은 친절히 알려주셨고 그렇게 리허설은 시작된다.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교가 제창.


하나 둘 씩 차례가 지나간다.



"다음 순서로, 


학교를 빛낸 자랑스러운 학생들에 대한 시상식이 있습니다. 


호명하는 학생은 강단 위로 올라와 주세요."



서울대에 합격한 K1과 K2가 먼저 호명되고 


그 다음이 내 차례


아니 P의 차례이다.



“3학년 2반 P 학생 강단 위로 올라와 주세요.”



강단 위로 올라간다.


마치 P인양 씩씩하게.



P의 대리인인 내가 강단에 올라서자


1층에서는 의아해 하는 동급생들의 표정이,


2층에선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들의 부러움이 느껴진다.


그 순간, 강당의 학생들 한 명 한 명이 느낀 그 감정의


모든 합보다 더 큰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나를 짓누른다.


1000명의 감정을 한 사람이 느끼기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5줄도 안 되는 상장이 법전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간다.







한참이 지났을까, P의 시상이 끝난다.



나는 다시 한 번 P인양 씩씩한 걸음으로


강단에서 내려와 자리로 돌아온다.


P가 아닌 나로 돌아온다.


리허설이 끝난다.







리허설이 끝나자 강당에 부모님들이 들어오신다.


한 손에는 꽃다발을 한아름,


다른 한 손에는 선물처럼 보이는 포장된 상자를 들고.


내 부모님께서도 마찬가지이다.


멀리서부터 나를 알아보고는 손을 흔드신다.


나도 반갑게 손을 흔든다.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내 마음을 흔든다.



‘나는 곧 P가 되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님 앞에서.‘



난 이미 한 번 P가 되어봤으니 한 번 더 쯤이야..


그렇지만 부모님의 마음이 어떨지 생각하니


내 마음이 벌써부터 아프다.



그때 기적과 같이 P가 나타났다.


내가 아닌 진짜 P가 나타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P는 


담임 선생님께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나에게도 말을 건넨다.


경쟁자였지만 서로를 챙겨가며 공부했던 우리였기에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P는 이제 내가 P 대신 앉아있던 제일 앞 의자에 앉았고


나는 친구들 사이에 몸을 숨긴다.



그 이후, 졸업식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진행되고


나는 친구들과 자리에 앉아 진짜 P의 수상을 지켜본다.


진짜 P가 나타나니 이제 1, 2층엔 의아함은 사라지고


부러움만 남았다.


아, 아니다.


내 마음에는 그 모든 부러움 보다 큰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졸업식이 끝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담임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친했던 친구들고 사진을 찍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음날 학원에 입소한다.






1년 후, 나는 정시에서


서울대 최초 합격


연세대 우선선발 합격


덤으로 원광대 의대 합격이라는 결과를 얻었고


K3로서 K1과 K2의 후배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같은 성씨를 가지고 있다.)



합격의 기쁨에 취해 있는 어느 날


메시지가 왔다.


“축하해! 서울대라니.. 진짜 부럽다ㅜㅠ”


메세지의 주인공은 P였다.


그 메세지에 답장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고맙다, 다 네 덕분이야ㅎㅎ”















졸업식으로부터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너무나도 생생한 기억이네요.


어쩌면, 


지우지 못한 가슴 아픈 기억이 아니라


지우지 않고 간직하고픈 기억이 아닐까 생각도 해요.




살아가면서 힘들 때 가끔 이때의 생각을 해요.


실제 졸업식이 아닌 리허설에서만 대리수상을 한 것이


다음에 내가 당당히 합격할 거라는 복선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힘든 마음이 가라앉더라구요.




지금 많이 힘든 학생들이 있을 거란 거 잘 알고 있어요.


게시판만 봐도 내가 떨어진 학교에 합격한 학생들이


합격 인증 글을 올려 축하받고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여요.


들어오기 싫지만 텅 빈 마음 속에 공허함이 가득해


뭘 해야 하나 몰라 자연스레 다시 여기 들어오는


그런 자신이 한심해 보일 수 있어요.


제가 그랬거든요.




한 번 더 시작하려는 학생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지금 느끼는 감정을 기억하세요.


잊지마세요.


그치만.. 


그렇지만 이 감정에 젖어있지는 마세요.


털어내세요.


여기까지는 리허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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