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전문학교 [686476] · MS 2016 · 쪽지

2018-06-22 01: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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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7080세대 서울대 수석 입학·졸업생들의 그 후 절반 이상이 직업으로 교수 선택 다음은 기업인, 법조인, 의사 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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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89년 서울대 단과대 수석 입학·졸업생 481명 중 직업 확인된 사람은 277명.
    그중 절반 이상이 대학교수 돼
⊙ 서울대 수석 최다 배출 1위는 경기여고, 2위는 경기고
⊙ 전체 수석 입학생들의 법학과 선호 현상 뚜렷
⊙ “다시 태어나도 지금과 비슷한 삶 살 것 같다”


  공부 비결은 “학교 수업과 교과서”, 전국 수십만 학생들의 눈총을 받았던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발언, 입을 맞춘 듯 “부모님과 선생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수석 소감의 주인공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1970년에서 1989년 사이 대학교 수석 입학을 했거나 수석 졸업을 한 사람들은 지금 현재 40~50대가 되어 사회의 중추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소위 7080세대 수석 학생들의 표본을 구하기 위해 1970~80년대 입시 결과 상위 3개 학교였던 서울대·연세대·고려대에 수석 학생 자료를 요청했다. 그러나 서울대 입학관리과는 “1994년 이전의 자료는 보관하고 있지 않다”고 했고, 다른 대학교들도 “30~40년 전 자료는 폐기된 지 오래”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영인본으로 남아 있는 서울대 學報(학보)인 의 당시 입학식과 졸업식 기사를 열람했다. 나머지 두 대학교 도서관에 문의한 결과 1970~80년대 연세대 학보 와 고려대 학보 은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본 기사에 나오는 수석 입학생과 졸업생은 서울대만 대상으로 하게 됐음을 밝힌다.
 
  1970년부터 1989년까지 서울대 학보에 실린 입학식과 졸업식 기사를 찾아 수석 학생 명단을 정리했다. 해당 학생의 사진과 출신 고교, 입학 성적까지 공개된 연도가 있는 반면 수석 학생에 대한 내용이 보도되지 않은 해도 있었다.
 
 
  서울대 수석입학·졸업자들을 추적하다
 
  1984~89년도 학보에서는 전체 수석 입학생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1985~87년과 1989년 기사에서 단과대 수석 학생 명단을 찾을 수 있었지만 전체 수석 입학자 또는 졸업자의 이름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1975년과 1980년도 신문에서는 전체 수석 입학자의 이름은 나왔지만 단과대 수석 입학자 명단은 나오지 않았다.
 
  단과대 수석 학생의 이름은 나왔으나 전체 수석 학생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연도는 단과대 수석 학생들 대상으로 전체 수석 여부를 물어봤다. 최대한 많은 학생에게 접촉하려 했으나 신원 확인이 안되는 경우가 빈번해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다.
 
  총 20년에 해당하는 대학신문 열람을 통해 수석 입학생 199명과 수석 졸업생 282명 등 총 481명의 명단을 확보했다. 여기서 수석 학생의 수는 전체 수석과 단과대 수석, 복수 수석 모두를 포함한다. 기사에 나오는 수치는 모두 서울대 학보 ‘대학신문’을 기준으로 통계를 냈다.
 
  수석 학생 명단을 추리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그들의 직업을 알아내는 일이 더 큰 과제였다. 조선닷컴 인물정보를 통해 학생들의 현재 소속을 찾을 수 있었지만 검색되지 않는 사례가 많았다. 知人(지인)들의 傳言(전언)을 통해 근황을 알게 된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사례는 소수에 불과했다. 서울대 총동창회 측에 취재 협조를 요청했지만 개인 정보와 관련된 사안이라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취재 중 ‘서울대 동문 CEO 명부 2008 수정판(이하 서울대 동문 명부)’을 입수해 수석 학생의 직장 정보를 추적했다. 서울대 총동창회는 서울대 동문 명부를 발간할 때 본인이 신상공개를 원치 않을 때는 수록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原名(원명)을 개명한 동문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기재하며 주소 및 연락처는 본인이 원하는 연락처로 기재한다고 했다. 서울대 총동창회 측은 올 가을에 2009년판 서울대 동문 명부를 펴낼 계획이라 밝혔으나 취재일정과 명부 발간일이 불확정한 이유로 대다수 학생의 직업을 2008년을 기준으로 조사했다.
 
 
  한국의 수석 입학·졸업생은 공부만 하는 스타일
 
   1970~80년 사이 수석 입학생과 졸업생 총 481명 중 57.58%에 해당하는 277명의 직업을 집계한 결과 수석 학생들이 진출한 職種(직종)은 교수 53.79%(149명), 기업인 13.35%(37명), 법조인 7.22%(20명), 의사 6.85%(19명), 공무원 5.77%(16명), 약사·예술인 각각 2.88%(8명), 국회의원 1.03%(현직 5명) 순이었다. 특히 졸업 후 교수가 된 수석 학생을 전체 비율로 따지면 약 31%를 차지했다. 1970~89년까지의 파악된 전체 수석 졸업생 19명 중 15명이 교수가 된 것으로 나타났다.    참고로 서울대는 1986년까지 각 단과대학별로 돌아가며 전체 수석 졸업생을 뽑아 대통령상을 수여했으며 1987년부터는 평점 고득점 순으로 수석 학생을 선발했다. 제28회 졸업식이 열렸던 1974년 2월 20일자 에 1974년 대통령상 수석 학생 선정에 대한 뒷이야기 기사가 실렸다. 당시 대통령상 수상 순서는 미대였는데 미대 수석이었던 회화과 정모군이 교련 과목에 C학점을 맞은 사례가 있어 응용미술학과의 金情(김정·현 환경포럼 대표이사) 학생이 대통령상을 받게 됐다는 내용이다.
 
  수석 자리를 놓친 남학생에게 심경을 묻자 “교련 과목이 유죄”라며 길게 탄식했다고 한다. “해마다 졸업시즌이 되면 그해의 서울대 수석졸업자는 서울대생 자신들보다도 일반국민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고 시작한 기사는 수석 졸업에 대한 당시 관심도를 드러냈다.
 
  1979년도 서울대 사범대를 수석으로 입학했던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직업진로정보센터 林彦(임언·49) 연구위원은 “우수 학생 기준이 한국은 학업 성적 위주인 반면 미국은 포괄적이고 全面的(전면적)”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수석 입학 또는 졸업을 한 학생이라 하면 거의 공부만 하는 스타일일 겁니다. 미국과 한국 교육 시스템이 다르니 우수 학생 양상도 다를 수밖에 없어요. 서울대 수석 학생들 대부분이 학계에 나간 이유는 교수직이 갖는 한국의 사회적 의미가 크기 때문이라 봅니다. 교수직이 갖는 미국과 한국의 위상이 다르기도 하지요.”
 
  1975년에 법대를 수석 졸업한 申熙澤(신희택·56) 서울대 법대 교수는 수석 학생 대부분이 교수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결과에 대해 “정해진 수순”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공부하는 적성을 살리다 보면 학계로 가는 것이 당연할 수 있어요. 성실한 데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니 계속 공부하는 길을 걷는 거죠. 제자리를 찾아간 결과라고 봅니다.”
 
 
  물리학과, 경제학과를 많이 선택
 
수석 출신 학생 중 물리학 교수가 된 사례가 많다. 왼쪽부터 임지순(70년 수석 입학), 오세정(71년 수석 입학)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안창림(84년 수석 졸업) 이화여대 교수.
  교수가 된 149명의 수석 학생 중 여자가 44명, 남자가 105명으로 서울대 교수가 된 사례가 44명으로 제일 많았다. 서울대 자연과학대와 의과대에 각각 8명이 부임했으며 5명은 공대, 사회과학대·인문과학대·상경대·생활과학대에는 3명씩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 밖의 전공으로 농대·법대·사범대·약대(각 2명), 치대·음대·수의대(각 1명)이다.
 
  서울대 이외의 학교에 부임한 사례로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10명으로 제일 많았고 인하대 6명, 건국대 4명이 뒤를 이었다. 전공 분야를 보면 29명이 공대 교수가 되었고 상경대 18명, 사범대 8명 순이었다.
 
  1970년대 대학에 들어가려면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치러야 했다. 예비고사 성적은 대학별 본고사 전형에 30% 정도 반영되었기 때문에 예비고사 수석이 입학 수석을 보증하진 않았다. 林志淳(임지순·58), 吳世正(오세정·56)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와 韓兌淑(한태숙·56) 한국과학기술원 전자전산학과 교수는 예비고사와 본고사에서 모두 수석을 해 서울대에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다. 본고사 580점 만점에 447점을 맞은 한태숙 교수는 전자공학과를 지망했다. 임지순·오세정 교수는 모두 당시 文理大(문리대) 물리학과를 지망했다.
 
  서울대 물리학과 80학번이자 1984년도 수석 졸업생인 安昌琳(안창림·47) 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는 물리학과 선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에는 전공과 대학을 성적으로 결정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그러나 인기 전공은 현재와 많이 달랐습니다. 제가 다니던 서울대에서는 법대, 의대 등 전통적으로 인기 있는 분야 외에도 물리와 경제 등 어렵다고 여겨지던 학문이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는 본고사와도 관련이 있다고 보는데, 본고사는 어려운 문제를 잘 푸는 능력에 따라 좌우됐어요. 따라서 학생들이 어려운 문제나 학문에 대한 거부감이 현재보다 적었고 그중에는 오히려 물리학과 같은 어려운 학문에 도전해 자신의 능력을 확인해 보려는 진취적인 생각을 가진 학생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1978년도 전체 수석 입학자인 車國麟(차국린·50) 교수와 1989년도 자연대 수석 졸업자인 최선호 교수도 물리학을 전공해 모교에서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임지순 교수는 본고사에서 550점 만점에 410점을 맞았고 수석 입학생 인터뷰에서 “물리학에 전념, 훌륭한 물리학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오세정 교수는 본고사에서 580점 만점에 478점을 맞았는데 1975년 졸업할 때도 단과대 수석이었다. 오 교수는 “과학을 좋아했는데 물리학이 화학과 생물 과목에 비해 외우는 것이 적어 더 좋아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수석 학생들 중 물리학을 전공해 물리학과 교수가 된 사례가 많았다. 임지순·오세정·차국린·최선호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외에 李範勳(이범훈·1972년 수석 입학) 서강대 교수, 張基柱(장기주·1976년 수석 졸업)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姜準熙(강준희·1977년 수석 졸업) 인천대 교수, 權容暻(권용경·1982년 수석 입학) 건국대 교수, 안창림 이화여대 교수, 이필진(1987년 수석 졸업) 고등과학원 교수가 있다.
   1970년도 공대 수석 입학을 했던 宋文燮(송문섭·57) 유티스타컴 대표이사는 “물리학이나 화학이 인기 있었지만 진로가 뚜렷한 학문이 아니라 아주 우수하거나 뜻있는 학생이 많이 갔다”고 했다.  
  1970년 학위수여식 때 사범대 수석을 한 李基榮(이기영·61)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교수의 말이다.
 
  “성적이 우수하면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계속 공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어요. 이런 사고방식이 30~40년 전에는 더욱 보편적이었지요. 그때는 한 번 전공을 택하면 끝까지 갔어요. 공부를 하다 보니 학문에 흥미를 느껴 학계로 나가는 경우도 있고, 그동안 쭉 해오던 공부를 계속 한다는 의미로 교수가 되는 사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안창림 교수에게 수석 입학생·졸업생의 상당수가 교수가 되었는데 1970~80년대에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학계로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대학원 졸업자들이 매우 적었어요. 학부만 졸업해도 충분히 전문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이공계 학생들의 경우 대학 졸업 후 전공 관련 산업체에 취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당시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생들은 대부분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기업체가 아닌 연구소에 취업했어요. 연구직을 선호한 것이죠. 연구직에 대한 평판이 좋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마음껏 연구에 전념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대우를 받는 교수직에 많이 진출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수석 학생’ 현역 국회의원 5명 
 
  수석이란 타이틀이 교수 임용에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 안 교수는 “학부 성적과 연구능력은 큰 관련이 없기 때문에 수석졸업이 교수임용에 도움이 된다고는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기영 교수는 “학부 성적이 높으면 교수님들이 좋게 보셔서 자리가 났을 때 기회가 주어지는 등 유리한 점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수석 졸업생이란 타이틀을 의식한 적은 없다고 덧붙였다.
 
  1970년대 초 서울대 전체 수석 입학생들은 이공계열에 많이 진학했지만 1970년대 중반 들면서부터 법학과를 선택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법조인이 된 수석 학생들의 대부분이 법학을 전공했다. 사법고시에 합격해 판검사의 길을 걷는가 하면 임관하지 않고 곧바로 변호사의 길로 나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법조인 생활을 하다 정치인의 길을 걷는 사례도 있었다.
 
  1970~1989년까지 법대를 수석 입학하거나 수석 졸업한 학생들의 명단을 정리한 결과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던 35명 중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16명이었고 대학교수 5명, 정치인 5명 순이었다. 가장 많이 가입해 있는 로펌은 김&장 법률사무소였다.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서울대 법대로 籍(적)을 옮긴 신희택 서울대 법대 교수는 1975년에 열린 졸업식에서 법과대 수석이자 전체 수석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1977년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수료한 그는 任官(임관)하지 않고 곧바로 김&장 법률사무소의 변호사로 들어가 화제를 일으켰다. 신 교수에게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물었다.
 
  “당시 법대생들의 학점이 낮았습니다. 많은 학생이 ‘학교 공부와 고시 공부는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신림동 고시촌이 없던 시절이니 학교 수업 빼먹고 고시 공부하러 도서관에 많이들 갔죠. 저는 학교 공부 위주로 사법고시 준비를 했습니다. 학업과 고시 공부를 이분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지요.”
 
  1970~1989년 사이 서울대를 수석으로 입학했거나 수석으로 졸업한 학생 중 국회의원이 된 경우는 6명이었고 수학을 전공한 채수찬 전 의원을 제외하면 현재 18대 국회의원으로 있는 수석 학생 모두 법대 출신이다. 李玲愛(이영애·61) 자유선진당 의원은 1971년 법대를 수석 졸업했다. 그해 제13회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 의원은 여성 최초로 사법고시를 수석 합격하고, 여성 최초 고법 부장판사와 법원장(춘천지법)을 지냈다.
 
  법무부장관을 지낸 千正培(천정배·55) 민주당 의원은 1972년도 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 余尙奎(여상규·61) 한나라당 의원은 1977년 법대 수석 졸업, 高承德(고승덕·52) 한나라당 의원은 1980년 법대 수석 졸업 출신이다. 고 의원은 대학교 2학년 때 사법고시 최연소 합격, 이듬해 외무고시와 행정고시를 각각 차석과 수석으로 합격했다.
 
  1982년 법대 수석 입학생은 元喜龍(원희룡·45)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원 의원은 학력고사 전체 수석과 제34회 사법시험 수석 합격을 했다.
 
현역 국회의원이 된 수석 학생들은 모두 법대를 나왔다. 왼쪽 위부터 이영애(71년 수석 졸업) 자유선진당 의원, 천정배(72년 수석 입학) 민주당 의원, 여상규(77년 수석 졸업), 고승덕(80년 수석 졸업), 원희룡(82년 수석 입학) 한나라당 의원.
  1976년 서울대 전체 수석 입학을 한 사람은 韓渭洙(한위수·51)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다. 사회계열로 입학한 그는 1학년 말 법학과를 택했다. 현재 한국언론법학회장을 맡고 있는 한 변호사는 “합격 정도는 할 것 같았지만 수석 합격이라 해서 매우 놀랐다”고 했다.
 
  공부에 대한 생각을 물으니 한 변호사는 “공부를 좋아한다기보다 공부하는 것 자체가 싫증이 안 난다”고 말했다. 일반 학생들이 들으면 좌절할 수도 있다고 하자 “공부가 버릇이 된 것 같다. 지금도 공부는 일이자 습관”이라고 말했다.
 
공직에 나간 수석 학생들. 권오곤(76년 법대 수석 졸업) 재판관, 김상철(70년 법대 수석 졸업) 前 서울 시장, 한덕수(71년 상대 수석 졸업) 現 駐美 대사.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舊(구) 유고슬라비아 戰犯(전범)국제형사재판소(ICTY) 재판관으로 선임된 權五坤(권오곤·55) 전 판사는 1976년 법대를 수석 졸업했다. 권 판사는 사법연수원 9기도 수석으로 수료했다.
 
  공직에 나간 수석 졸업생 중 국무총리였던 韓悳洙(한덕수·60) 주미 대사도 있다. 1971년 서울대 상대를 수석 졸업한 한 대사는 재학 중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공직에 진출했다. 1970년 법대를 수석 졸업한 金尙哲(김상철·62) 변호사는 1993년에 서울시 시장에 올랐다가 7일 만에 물러났다.
 
 
  기업으로 진출한 ‘수석’들
 
  학계에 진출한 수석 학생들이 많았지만 회사원이 되거나 경영 활동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고학번으로 갈수록 임원급 학생의 수가 많았다. 식자재유통과 단체급식사업을 하는 CJ프레시웨이의 李昌根(이창근·57) 대표는 1970년도 서울대 상대 수석 입학생이었다.
 
  다국적 휴대폰 기업 유티스타컴(UT Starcom)의 송문섭 대표이사도 1970년도 공대 수석 입학 출신이다. 그는 팬택앤큐리텔의 대표이사로서 국내 최초로 카메라폰을 개발했다. 송 대표는 “40년 전 이야기를 하려니 쑥스럽다”면서 자신은 학계 대신 산업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고 밝혔다. 그의 말이다.
 
  “수석 입학은 우연이었습니다. 시험 한 번 잘 보면 되니까요. 한국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시험을 잘 본다는 의미라고 봐요. 저의 경우 공부를 근본적으로 파고 들기 보다 시험 대비를 잘했다고나 할까요.”
 
  權熙珉(권희민·57) 삼성전자 디지털솔루션센터 센터장 (부사장)은 1974년 문리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물리학을 전공한 권 부사장은 한국첨단게임산업협회장을 맡고 있다. 曺慶穆(조경목·46) SK 상무는 1986년도 경영대 수석 졸업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번역 네트워크 ‘사이에’ 운영과 출판 기획을 하고 있는 林喜根(임희근·51) 대표는 1976년도 인문계열 수석 입학생이었다. 불어불문학과를 택한 임 대표는 1976년 예비고사에서도 수석을 했다. 1980년과 1984년 각각 법대를 수석 입학·졸업한 朴炳武(박병무·48) 변호사는 하나로텔레콤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수석 학생 총 481명(수석 입학생 199명, 수석 졸업생 282명) 중 255명의 출신고를 알아내어 통계를 내 보았다. 고교 평준화 첫 세대인 1977학번 이후와 그 이전 학번을 기준으로 나누었을 때, 고교 평준화가 실시된 후에 수석 학생 배출 고교가 다양해졌다. 고교 평준화 실시 이전 이후 상관없이 수석 학생 배출 순위 1, 2위는 경기여고, 경기고 순이었다.
 
  경기고를 나온 오세정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는 “워낙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 곳이라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해도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는 분위기였다”며 “오히려 지금이 자신의 학창시절 때보다 입시 열기가 치열해진 것 같다”고 회고했다.
 
  한편 확인된 의대 출신 수석 31명 중 13명은 대학 부설 병원에서 의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13명 중 임용규 고려대 의대 치의학 교수만 유일한 여자다. 임 교수는 4.3만점에 4.13점의 졸업 학점으로 1987년 서울대 전체 수석 졸업을 했다. 1987년은 단과대별로 돌아가면서 전체 수석 졸업생을 선정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학점으로만 뽑게 규정을 바꾼 해다.
 
  임 교수는 당시 학보와 인터뷰에서 “전체 수석 졸업은 자신이 노력한 것에 대한 보답이란 생각도 있지만 그에 앞서 앞으로 더 잘하라는 채찍질 같아 부담스럽다”고 답했다.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13명의 수석 입학·졸업생 중 9명이 서울대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다른 4명의 소속은 각각 경희대, 건국대, 고려대, 충북대 병원이었다.
 
  대학 병원에 근무하지 않는 수석 학생들의 진로를 보면 金東洵(김동순·50·1973년 의대 수석 졸업)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 과장과 金鎬仲(김호중·49·1979년 의대 수석 입학) 삼성서울병원 호흡기 내과 과장을 제외한 모두가 개업의를 하고 있었다.
     미국 유학 가서 ‘우물 안 개구리’ 실감
 
  수석 학생들에게 항상 공부가 자신 있었는지 묻자 “미국 유학 시절 우물 안 개구리임을 알았다” “좌절감을 느꼈다”는 등 의외의 답변들이 나왔다. 입학과 졸업 모두 수석을 한 오세정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는 “미국에서 유학할 때 큰 충격 받았다”고 했다.
 
  “미국으로 유학 갔을 때 한국의 교육 시스템과 달라 현지 적응하는 데 힘들었어요. 그때 저 혼자 한국인이었는데 답이 없는 새로운 문제에 도전하고 불확실한 것에 주력하는 미국 친구들의 모습은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답이 틀릴 것 같으면 말을 못하겠는데 다른 학생들은 답을 몰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야기하더군요. 그때 알았어요. ‘나는 완벽한 결과와 과정이 정해져 있는 문제에만 능하구나’라고요. 때문에 지필성적은 좋았더라도 팀을 만들어 연구하는 활동은 한동안 어려웠어요. 문제를 만드는 과제도 애를 먹었지요. 아마 지도교수님은 저를 보고 ‘저 친구는 뭐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좋은 교훈이 되었지요.”
 
  신희택 서울대 법대 교수는 “미국의 세미나 수업에 참여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세미나에서 제 생각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보고 읽은 것 외에는 생각을 못하겠더군요. 영미계통 친구들이 자기 생각을 서슴없이 씩씩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서 제가 얼마나 독자적인 생각을 못하는지 알았어요. 암기한 것을 復記(복기)하고, 정답 찾아 쓰는 식의 한국 교육에 익숙했던 것이죠. 觀(관)을 세워 최선의 방법을 찾는 훈련이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다음은 안창림 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의 말이다.
 
  “국내 최고학부 최고학과를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자부심 때문에 국내보다는 국제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자신도 있었죠. 그러나 진정한 능력은 물리문제를 잘 풀어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스탠퍼드 대학에 입학해 신입생들을 만나 보니 제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알게 됐어요. 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이미 매우 많은 지식을 쌓고 있었고, 교수와 학생 간의 관계가 밀접해 단순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공동연구로 이어지곤 했죠. 더욱이 미국의 학부교육은 한국에 비해 매우 철저했습니다. 뛰어난 외국 학생들을 보았을 때 좌절감도 느꼈죠. 한국에서 통상적인 교육만 받았던 제가 부족했다고 느낀 경험이 되었습니다.”
 
 
  수석 학생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취재를 하며 만난 수석 학생들에게 ‘행복’에 대해 물었다. 행복이 성적순이라 보는지,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경력을 지닌 당신은 행복한지, 다시 태어나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의견 등을 물었다.
 
  “행복의 기준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아닐까요? 다시 태어난다면 공대를 다시 택하겠어요. 공대 외에 다른 걸 잘할 것 같지 않아요. 지금 하는 일이 재미있고 좋아하니 저는 행복합니다.”
 
  송문섭 유티스타컴 대표이사는 행복의 기준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을 꼽았다.
 
  “제 좌우명이 ‘인생은 짧다’입니다. 중학교 때 공부를 안 해서 꼴찌였는데 이 말 듣고 정신 차렸어요. 한 번밖에 못 사는 인생에 누굴 미워하고 원망할 시간이 있나요. 좋은 일 하며 살기에도 바빠요.”
 
  오세정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도 “관심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을 행복의 조건으로 꼽았다.
 
  “예나 지금이나 의대가 인기 있었지만 저는 의대 안 가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의대 들어와서 중도에 포기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은행처럼 근무환경이 쾌적한 직장에 들어간 친구들도 많은데 현재 첫 직장에 남아 있는 친구가 한 명도 없어요. 지금 좋은 직장과 향후 좋은 직장의 개념이 다르고 남들이 선호하더라도 내게 맞지 않으면 아닌 겁니다.”
 
  안창림 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는 “작은 것에 만족하려는 편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에 만족합니다”라는 행복의 기준을 말했다.
 
이기영(왼쪽) 교수와 신희택 교수는 “공부는 사람을 평가하는 일부분이며 다양한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기영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교수와 신희택 서울대 법학과 교수는 이구동성으로 “남과 비교하는 자세 대신 다양한 가치 체계를 수용하자”고 말했다.
 
  신희택 교수는 “단일한 가치 체계를 추구하는 우리 사회는 반성해야 한다”며 “남이 좋다는 가치를 따르지 말고 독자적 생각을 하라”고 강조했다.
 
  “사람마다 우선 순위로 두는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하나요? 돈이 많은 사람은 그 나름 또 고민이 있어요.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다양하지 않아요. 돈, 학업 성적 등의 몇 안되는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려 하죠. 본인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행복을 찾고, 자신이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가치를 택하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이기영 교수는 “본인이 스스로 생각해서 받아들이는 삶을 살고 있는지 여부가 행복의 기준이다”고 했다.
 
  “공부 잘하는 것은 사람의 여러 능력 중 일부분일 뿐이에요. 우리 사회가 남을 많이 의식하니까 사회의 세속적인 기준에 비교하며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교수에게 2009년의 대학생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자 “그동안 모범적으로 살아서인지 일탈을 하고 싶다”고 답했다. 답을 한 지 얼마 안되어 이 교수는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일탈하더라도 마음이 불편해 다시 모범생으로 살 것 같아요. 대학생으로 돌아간다면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저 스스로 자신 있게 학문했다고 말할 정도로 더 몰입해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송문섭(왼쪽) 대표와 한위수 변호사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살 것 같다”고 밝혔다.
  같은 질문을 한위수 변호사에게도 했다.
 
  “다시 대학생이 된다면 돌아가고 싶긴 한데 무얼 할지 평소 생각 안 해봤어요. 결국 다양한 지식을 쌓는 등 30년 전이나 비슷하지 않을까요? 열심히 공부하고 고시 준비하고요.”
 
  ‘模範生(모범생)’들과의 인터뷰여서인지 정말 반듯하고 성실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과도하게 모범적인 것 아닌가?’라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신희택 교수는 ‘모범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모범생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모범 학생, 모범 변호사였고 현재는 모범 교수가 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고 상식에 맞는 건전한 생활을 하는 것이 ‘모범’의 뜻이라면 모범생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재밌네요,, 허허.. 부럽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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