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킴 [726956] · MS 2017 · 쪽지

2018-07-18 14:55:29
조회수 1,747

철학 수업 A+ 받음////

게시글 주소: https://i.orbi.kr/00017782475

시험은 없고

레포트와 출석으로만 평가되는 수업...

어찌 레포트를 잘 썼는지

좋은 성적을 받았네요.

약 먹고 졸면서 써서 중간에 오타도 있습니다만 

그냥 올려봄.

-----


1

  우리는 어떻게든 현재만을 사는 존재다. 과거와 미래가 우리의 인식에 존재하지만 우리의 육신은 그곳에 닿을 수는 없다. 과거나 미래는 우리의 인식 속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나간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때로 돌아가고픈 욕구를 느낀다. 그러나 돌아갈 순 없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감을 잡을 수 없어 두려움을 느끼거나, 착각으로 인한 기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미래의 일들이 현재로 실현되기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 우리는 늘 불만족의 상태로 현재를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고는 추억에 잠기며, “이 땐 이랬지.” 하는 동경심을 갖는다. 하지만 현재의 사진엔 불만족이 가득하다. ‘배가 너무 나왔어.’, ‘어깨가 너무 좁아.’, ‘코가 너무 낮아.’ 하는 식의 절망이 담겨있다. 만약 누군가가 이처럼 실망하고 불만족하는 삶을 산다면, 그 이유는 이상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그의 이상과, 비루하고 고통스러운 그의 현실 사이의 괴리가 그에게 가져다주는 절망감이 이런 현상을 낳은 것이다.

 우리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벽. 부조리함을 마주칠 때마다 커다란 절망을 겪는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도 질문한다. ‘우리는 왜 살까?’ 이 질문은 우리에게 아주 거대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건네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을 답할 수 있는 사람과 방법은 많겠지만, 대부분의 방법들은 우리의 커다란 상심을 회복시켜줄 수는 없을 것이다. 가벼운 위로들은 저 질문의 답변이 되어줄 수 없고, 그저 질문의 답변을 미룰 수 있게끔 도와주는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면으로 맞서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먼저 저 질문을 분석해봐야 할 것이다. ‘왜 살까?’ 라는 질문은 과거의 우리에 대한 질문이 될 수 있다. 즉, ‘우리는 어떻게 살게 되었을까?’ 하는 존재에 대한 질문이 될 수 있다. 그 다음, 현재에 대한 질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마지막으로 우리의 미래에 대한 질문도 될 수 있다. ‘우리가 죽어서는?’

 이런 질문들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철학 한 분야만으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차분하게 해결해 나가보도록 하자.


2

 먼저, ‘우리는 어떻게 살게 되었을까?’ 하는 과거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몇몇 유신론자들은 신이 우리를 창조해냈을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우릴 이루고 있는 수많은 것들은 아주 작은 알갱이들로, 특정한 물리학적 법칙에 따라 우리를 구성한다. 따라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규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만들어지게 된 과정을 탐구해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물리학과 생물학 등이 발달하면서 생명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밝혀졌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초기 지구를 구성하던 물질들이 우연적으로 아미노산을 만들고, 이들이 단백질을 만들어 복사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놀랍고도 정교한 화학적 반응이 하나의 실험을 통해서 일어난 게 아닌, 아무런 의지가 없는 우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질문이 더 발생한다. 이 우연의 원인이 신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다. 

 생명체가 이렇게 태어났다면, 생명체가 태어나게 된 계기가 되는 환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우주가 탄생하고 태양이 만들어지고 지구가 만들어지고…. 이것도 또한 앞서 말했던 우연의 산물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조건 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할까? 이는 조금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몇몇은 이에 긍정할지 모르지만 무신론자들과 같은 사람들을 설득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탐구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 지성을 통한 파악을 포기하고 절대자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 항복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만일 신이 없다고 한다면, 어떤 우주의 이론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이론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우주의 탄생이 되는 빅뱅을 일으켰고, 태양을 만들었으며, 지구가 식어가며 생명체를 만들게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나오게 되었고, 이를 다시 추적해나가는 과정에 있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이 이론이 완성되고 밝혀진다면,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만족할 수 있을만한 답을 만들어낼 수 도 있겠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애초에 존재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나가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 수 있다.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답변이 우리에게 어떤 유용함을 가져다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또는 우리에게 어떤 해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이를 탐구하는 이유는, 스티븐 호킹이 말했던 것과 같이, 오로지 우리가 호기심, “앎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유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 사유는 큰 의미가 있다. 모든 생명체들이 우리와 같은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우리와 또 다른 생명체들을 구분하는, 즉, 인간만이 지닌 특별함을 규정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사유할 수 있는 인지능력을 지닌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지 능력을 지닌 동물들은 인간 말고도 많지 않은가? 고릴라나 침팬지, 돌고래 등도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과 이들을 구분하는 것은 그저 지적 능력의 양적 차이일 뿐일까. 이렇게 된다면 우리의 존재는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답변도 ‘동물처럼.’ 이라는 받아들일 수 없는 답변이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줄 수 있는 과학자가 있다. 리처드 도킨스는 우리의 지적 활동을 포함한 모든 행동들을 유전자를 이용해 과학적인 설명을 시도한다. 그는 앞서 말했듯, 이성은 어떤 동물들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나’로 존재하는 것. 이런 주체의식도 단순히 환상에 불과하며 자신의 생존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우리가 만들어낸 문화도 생존을 위한 하나의 규범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저 양적으로 우수한 지성을 가졌을 뿐인 동물에 불과할까. 우리와 다른 짐승들을 규정하는, 우리만의 것들은 존재하지 않을까.


3

 빅터 프랭클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다. 그는 수용소에서 겪었던 고통 속에서도 사유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생존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지, 혹독한 겨울은 어떻게 지낼지를 자주 생각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그는 “작은 문제들만 생각하는 내 자신이 역겨워졌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 인간이 어떤 시련과 고통을 받든지, 어떤 극한의 상황에 놓여있든지 간에 인간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아주 숭고한 행위라고 말한다. 

 만일 인간이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생물이라면 이런 사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도킨스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성을 이용해야 하는데, 이런 모습은 이에 반하는 자기 반성적 사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인간만의 답을 낼 수가 없다고 위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해냈던 사유의 결과로는 인류와 동물을 규정하는 다른 요소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현재에 관한 질문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조건을 얻게 된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올바르게’ 살 것을 주장했다. 이는 윤리학적인 문제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한 근거는 아주 약한 편이다. 비윤리적으로 산다면 법을 어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분명 윤리적으로 사는 것보다 많은 편익을 얻음을 알 수 있다. 혹은 극단적으로 비윤리적인 행동을 한다면 이것이 오히려 새로운 정의를 세울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에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이를 지키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윤리와 도덕의 폭력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언제나 도덕이나 윤리도 다양한 삶의 종류가 선택지로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로 무엇을 제시했는가.

 소크라테스는 아쉽게도 내세론을 주장했다. 인간은 물질인 육체와 비물질인 정신으로 이루어졌으며, 윤리에 어긋나는 활동을 할수록 정신의 무게가 무거워져 극락으로 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신활동도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반응임을 알게 된 우리를 설득시킬 수 없다. 위에서 알아봤듯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주를 탄생시킨 물리학적 원리와 생물체를 탄생시킨 화학적 원리와 이를 번성하게 한 생물학 법칙이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토마스 홉스는 우리가 ‘자연 상태’를 살아간다고 말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이는 욕망의 충족으로 실현된다고 말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똑같은 능력을 부여했는데, 이는 힘이나 권력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 동등한 기회를 가질 능력을 가졌다는 말이다. 즉, 자연은 우리에게 욕망과 그를 충족시킬 능력을 같이 주었다는 것이다. 욕망의 충족은 힘의 원리에 따라서 실현된다. 강한 물리적 힘이나 권력을 가진 자가 더 많은 욕망을 충족시킨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추구하는 권리를 ‘자연권’이라 한다. 이는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욕구를 충족시키고,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지켜내고,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자신을 정체시키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이런 자연 상태에서 자연권을 지닌 개인들이 모인다면 서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시적으로 보이든, 보이지 아니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매일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전쟁함과 다름이 없다. 정말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되는 것이다. 이는 끔찍해 보인다. 우리는 안심할 때가 없이 언제든지 상대방보다 도태될 수 있고 공격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자연권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힘이 우선시 되는 상태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공포와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한다. 우리를 지켜야 할 도덕과 윤리는 힘에 의해 세워지기에 우리를 보호할 수 없다. 

 그리하여 홉스는 ‘제 1 자연법’을 주장한다. 우리는 평화롭게 살기 위해, 불안과 공포에 떨며 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서서 사회를 형성하고, 합의를 통해 자연권을 제한하며, 이를 토대로 국가를 건립하고 ‘인공 상태’를 만들어 ‘자연 상태’를 뒤덮고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물론 이에는 큰 문제가 존재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과연 합의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다. 과연 어떻게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


4

 임마누엘 칸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윤리를 지켜야 한다고 한다. 홉스의 ‘자연법’에서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기 위한 합의의 내용이 바로 이 윤리라고 할 수 있겠다. 모두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라면 윤리는 조건이 붙어선 안 되며, 정언 명령이어야만 한다. ‘남들이 보고 있을 때, 물건을 훔치면 안 된다.’가 아니라, ‘물건은 훔쳐선 안 된다.’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인 정언 명령이 될 수 있는 윤리이고, 그렇지 않은 것인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을 죽여라.’는 분명 정언 명령의 형태이지만 우리가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지 않은가. 칸트는 모두가 그에 따라 행동했을 때, 받아들일 수 있으면 도덕법칙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앞서 말한 ‘사람을 죽여라.’를 예로 들자면, 모두가 이처럼 행동했을 때 분명 행복한 삶을 만드는데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므로 도덕법칙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소크라테스의 ‘올바름’, 칸트의 ‘도덕법칙’에 따라 살아야 함을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은 분명 고통스럽다. 홉스가 말했듯, 우리는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본능에 따라서 유혹받고, 그렇게 행동하게 유도된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했듯, 우리는 생존하는 기계이며, 생존하기 위해 온갖 이기적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런 것에 넘어간다면 우리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게 되며, 스스로 인간의 품위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최대한 거부하며 살아야 한다.


5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질문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미래에 대한 질문만이 남았다. ‘우리가 죽어서는?’

 사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의 모든 활동은 화학적 반응에서 생겨난다. 죽는다는 것은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이 멈추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계속 살아가는 자들에겐 기억으로 남겠지만, 죽음을 맞이한 당사자는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하며 싸늘하게 식는다. 이는 꽤나 비극적이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와, 존재하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뮈에 따르면, 너무나도 두터운 벽인 죽음이라는 부조리가 우리 모두의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몇몇은 이런 부조리 앞에서 포기하고 허무주의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는 이를 생의 의지로 전환시키지만 또 누군가는 절망한 나머지, 생의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채로 사유의 자살을 택한다. 이 중 후자의 사람들은 분명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가 만약 사유의 자살을 택한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는 생존기계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죽음 이후에 그 무엇도 가질 수 없기에, 또 어디로 간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기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무의미하지만, 우리가 만일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고 살기를 원한다면, 짐승과 구분되는 특성을 갖길 원한다면, 육체적으로든 철학적으로든 죽음이라는 부조리에 맞서는 삶을 살아감이 옳다.

rare-제헌이 S

0 XDK (+1,010)

  1. 1,000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