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l Marx [59684] · MS 2004 · 쪽지

2012-11-01 23:54:01
조회수 3,706

반항아가 되자 - 매스미디어에 대항하여.

게시글 주소: https://i.orbi.kr/0003155352


아래 안철수와 수능 관련 기사를 보고, 댓글들을 읽어보다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어 예전에 썼던 글을 조금 손봐서 올립니다.

==================================================================

 9.11 비행기 테러를 기억하는가? 아마 필자가 중학생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그 때의 기억. 지금 오르비에 있는 많은 수험생들은 초등학교 3~4학년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실질적 기억은 거의 없겠지만 언론에 의해 재구성된 그 사건의 기억은 조각만이라도 가지고 있으리라 여겨진다. 필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고, TV를 보자마자 처음 든 생각은 딱 네글자로 말할 수 있다. '장난인가?'. 시간이 흐르고, 쌍둥이 빌딩의 양 건물은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양 건물의 완전한 붕괴.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사람들이 하나 둘 뛰어내리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타 죽는 것보다는 추락으로 인한 순간의 고통이 더 적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저러한 '답이 없는' 선택지 속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뒤로,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아프간과 이라크를 차례차례 공격했고, 당연히 두 나라는 쑥대밭이 되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전쟁들에서의 처참한 파괴의 현장은 직접적이고 밀착된 영상으로 방영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멀리서 본 '아름다운 폭발의 현장' 이라는 형태로 알려졌을 뿐.... 아프간전과 이라크전에서 그 두 나라의 군인, 민간인이 얼마나 죽어나갔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미군이 몇 명이나 죽었으며, 파병된 한국군이 몇 명이나 희생되었는지가 가끔 뉴스와 신문을 통해 알려졌을 뿐이었다. 9.11 테러 희생자들에게는 일인당 수백만 달러의 보상금이 돌아갔지만, 그 전쟁에서 희생된 아프간 민간인에게 돌아간 보상금이 고작 2천달러였다는 사실 역시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에 앞서, 그리고 그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우리에게 알려진 내용들은 '미군의 막강한 신무기'나 '테러집단을 때려부수기 위한 전술' 혹은 '미군이 얼마만큼의 영토를 점령했다' 라는 일련의 흐름들이었다. MOAB(Mother Of All Bombs)라는 신형 폭탄이 있는데 이게 터지면 원자탄처럼 버섯구름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나, 유도탄이 어떤 시스템을 통해 얼마나 정밀하게 적을 타격하는가 하는 기술적 분석과, 이라크 정부가 만들어놓은 지하대피로를 파괴하기 위해 땅 깊숙히 박힌 이후에 터지는 폭탄이나 이런 이야기들. 그리고 미국군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상대 국가를 파괴하고, 짓이기고, 점령하고 있는지를 지도를 통해 설명한다거나 하는 뭐 그런 이야기들.

 마치 이것은,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전쟁이라기 보다는 어릴 적 즐겨 하던 코에이 삼국지와 같은 느낌이었다. '맹획군이 등갑병을 개발했습니다.' '조조군이 철기병을 개발했습니다' '유비군이 북평을 점령했습니다'. 군인은 몇 명이 죽었고, 아프간과 이라크의 민간인이 몇 명이 죽었으며, 각도계산에 실패하거나 악천후 때문에 유도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미사일들이 민가를 몇 채나 뽀각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철저하게 '주요 뉴스'에서 배제되었다. 이러한 기사들은 기껏해야 고작 네다섯 줄로 구석에 쥐톨만하게 배치되곤 했다. 마치 이 전쟁을 보도하는 미디어의 목적은 '이 전쟁은 미군이 준내 세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게임 구경하듯이 즐기세요' 라고 하는 것처럼 들리는, 그러한 일련의 보도행태였다고나 할까.

 사실, 언론이라는 것이 이러한 방식으로 기능하는 예는 수도 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가끔 보면, 군대 관련 기사들이 언론에 게시되는데 대부분 이런 식이다. 'XX사단 병사들, 자진해서 휴가 반납.' 까고 앉았네. 자진해서라는 말의 뜻이 뭔지를 모르고 기사를 쓰지 않는 이상 저런 개소리를 어떻게 감히 할 수 있을까. 중대장이 '자진 반납하자' 해서 욕하면서 한게 바로 저 자진 반납의 뜻이지. 하지만, 실상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오 그렇구나. 역시 대단한 군인!'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실 우리나라에서, '신문', '뉴스' 따위의 매체에는 상당한 권위가 부여되어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 않은가. 이것은 물론 당연히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도 그렇겠지만.

 언론의 왜곡보도와 부풀리기, 선정성 문제는 언제나 지적되는 심각한 문제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뻥튀기' 혹은 '교묘한 말돌리기' 식의 조작이다. 아래에서 올라온 글도 마찬가지이다. 안철수 교수가 말한 '교육 정책' 부분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새로운 내용을 살짝 첨가하면 바로 '까기' 기사가 완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은 사실 어떻게 보면 '완전 쌩 구라'를 치는 언론의 장난질은 아닐 수 있다. 물론 이 역시도 위험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더욱 무서운 이야기를 꺼내고자 한다.

 2008년으로 기억한다. 이때, 명동에서 대학생 시위가 있었다. 나름 큰 시위였고, 전경이 충돌했고 물리적 충돌이 꽤 강하게 일어났으며 당연히 살수차의 출동 등 이슈거리가 될 만한 사건들이 충분히 있었다. 만일 2005년만 되었다면, 이 일에 대해 조문동이라면 '폭력 시위로 얼룩진 명동' 따위의 기사가, 한경오라면 '평화적 가두행진에 물대포' 따위의 기사가 났을 법한 사건.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언론보도는 내가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심히 충격적인 행태였다. 이 사건에 대해 주요 언론이 택한 보도방법은, 다름아닌 '침묵'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 사건'이 되어버린 그 사건. 그리고 이 경험에서 필자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필자의 몸 속을 휘감은 것은 다름아닌 분노,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존재하는 두려움이었다. 21세기, 가장 발달된 정보통신 시스템을 가진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대한민국에서도 이러한 일련의 '통제'가 가능하다면, 다른 곳에서는 어떠할 것인가. 이러한 위험성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막아나가야 할 것인가. 만일 정부가 정말 마음먹고 '통제'라는 것을 실행하기로 결정했을 대, 우리는 과연 그 것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필자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이다.

 정부가 '통제가 아닌 척' 통제를 실시한다면(사실 이러한 종류의 통제는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이미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정부에 의한 통제로 한정짓지 않고, 특정 집단, 특정 계층에 의한 통제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그것을 알아차리고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혹시나, 더 나아가, 정부가 작정하고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 과거 5.18과 같은 사태를 다시 한 번 일으킨다고 한다면, 30년 전보다 수십 배는 강력해진 정부의 무력을 과연 일반 국민들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삽으로 창칼은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지만, 총은 거의 상대가 안 되고, 비행기나 미사일은 아예 스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어떤 방식을 통해 그 대응을 위한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뚜렷한 답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 그렇구나' 라는 식의 사고방식'으로는 어떠한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종의 '권위'에 대해 '수긍'하는 것으로 일관한다면, '권위'에 의거한 폭력은 결국 '다수'에 의한 폭력으로 변질되고, 이것은 오히려 '소수'가 아닌 '다수'를 말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버리게 되고 만다. 특정한 '권위'에 의해 일어나는 끊임없는 세뇌. 이 속에서 말살되는 '다수'가 되기 가장 쉬운 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는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노력하고, 알고 있다고 확신이 드는 것조차도 한번 더 의심하라. 어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는 착한 아이가 되지 말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반박하는 반항아가 되자. 지금의 약한 자신, 그리고 강한 무엇인가가 두렵다면, 일단 속으로라도 끊임없이 의심하라. 반항은, 조금 뒤로 미뤄 두어도 좋다.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