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고 조경민 [875628] · MS 2019 · 쪽지

2023-03-09 23:4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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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공부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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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에 도움이 되는 글은 아니지만


오르비에서 '철학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냐'라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제가 그 질문에 자신있게 답할 만큼 철학을 잘 아는 것은 아니나, 


철학을 공부하려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싶어 이렇게 몇 자 적어봅니다. 


본인은 연세대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여 전공 수료에 필요한 학점을 전부 이수했습니다.







왜 철학을 공부하려 하는가?



대학에서 내가 공부한 분야는 철학으로, 당시 나는 철학이 삶의 의미를 알려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우디 앨런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었을까. 철학이 얼마간은 유용하리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것이 결국엔 착오였던 셈이다.

-조너선 하이트, <바른 마음> 31쪽에서 발췌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에게 그 동기를 물어보면 


상당 비율로 '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와 같은 이유를 댑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철학은 삶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있는 학문이 아니며,


철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파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와 같은 주제는 


논리적이거나 실증적인 방법으로 논하기 어려운 것이고, 


따라서 이를 다루는 것은 학문의 영역에 포함하기 곤란한 측면이 큽니다.






물론 철학자들도 종종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철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알아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삶의 의미'와 같은 것은 


철학이 아닌 다른 것들로부터도 (어쩌면 더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경제학을 공부하면서도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사회학을 공부하면서도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으며 삶의 의미를 깨닫고, 


어떤 사람은 마라톤을 뛰며 삶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심지어 누군가는 앤드류 테이트의 영상을 보며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도 있고 


김제동의 강연을 보며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아마 두 가지의 질문을 떠올렸을 겁니다.


1. 그럼 철학은 뭘 배우는 학문인데?

2. 그럼 철학은 왜 공부해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철학은 크게 세 주제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무엇이 존재하는가? (존재론, 형이상학)

-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식론)

- 무엇을 해야 하는가? (윤리학)





비록 칸트는 저 분류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긴 했지만, 


저는 저것보다 쉽게 철학의 주제를 나타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공부하려는 목적 역시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듯합니다.


- 교양을 쌓고 싶어서

- 특정한 철학적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 논리적인 사고력을 키우고 싶어서

-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너무 좋아서


각각의 목적에 따라 철학을 공부하는 방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양을 쌓는 것이 목적이라면, 사실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것은 비효율적입니다.


철학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내용들은 대부분이 알지도 못하고


실생활에서 인용하기도 어려운 측면이 커서


차라리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과 같은 책을 읽거나


교양 유튜브를 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겁니다.






특정한 철학적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그 주제를 다루는 철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주제들은 철학을 공부하면서 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우리의 행동은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외부 환경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인가?

(현대 형이상학, 분석철학에서 다루는 주제)


  •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지식이 있을 수 있을까?

(로크의 <인간지성론>과 라이프니츠의 <신인간지성론> 사이의 논쟁)


  • '도덕적 행동'의 기준은 무엇인가? 시대나 장소에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기준이 있는가?

(윤리학에서 주로 다루는 주제)


  • 물리적인 몸과 완전히 구분되는 정신적 실체가 존재하는가?

(형이상학, 심리철학, 분석철학에서 다루는 주제) 





이러한 주제들이 철학이 주로 다루는 문제인데,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저러한 주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답을 내려볼 수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저 네 주제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철학과에 진학했고


결과적으로 철학과에서 공부한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런 주제들에 대한 논의를 따라가다보면, 


수학의 증명 과정을 따라가듯 고도의 논리적 추론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누적하다보면 논리적 사고력이나, 이해력도 크게 상승할 수 있습니다.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이 다른 분야의 학문을 공부할 때 빠르게 습득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본인이 관심 있는 주제를 파악하고,


그 주제를 다룬 책이나 논문을 찾고,


그 문헌들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찾아 공부하는 식으로 사유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실 위의 네 주제 같은 경우는 너무 유명한 주제들이라


교양 서적들에서도 다루는 것들이 많습니다.

(구글링만 잘 해도 효율적인 탐구가 가능합니다)






만약에 특정한 주제에 국한되지 않고, 


철학 자체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학생이라면


저는 가급적 다음의 순서대로 공부할 것을 권합니다.



0. 논리학

1. 대륙합리론 (데카르트-스피노자-라이프니츠)

2. 영국경험론 (로크-버클리-흄)

3. 칸트



일단 논리학을 알아야 대부분의 철학적 논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알겠지만, 


철학과 교수님들 역시 학생들이 기본적인 논리학 지식은 안다고 가정하고 수업합니다.




논리학은 독학할 수 있는 좋은 교재도 많고,


특히 요즘에는 수능 국어, PSAT, LEET와 같은 시험을 위한 실전적인 논리학 도서도 많아


비교적 순탄하게 공부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상 수많은 철학자들이 있는데도 


제가 데카르트부터 칸트까지의 철학을 먼저 공부하길 권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등장부터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크게 변한 것도 있고,


데카르트부터 칸트까지의 철학사를 모르면 그 이후의 철학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저때 나타난 철학들을 계승하거나, 비판하는 식이라서 그렇습니다.




가령 들뢰즈를 이해하려면 그가 비판한 헤겔을 알아야 하는데


헤겔을 이해하려면 헤겔에게 영향을 준 칸트를 알아야 하고


칸트를 알려면 그가 종합하고자 했던 대륙합리론과 영국경험론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시간이 아주 많다면 고대 그리스부터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수 있으나


실제로 그렇게 공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데카르트부터 시작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데카르트도 모르면서 하이데거, 들뢰즈, 데리다 같은 어려운 철학자를 공부하는 것은


무지와 독단으로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권하고 싶지 않은 공부 방법은, 철학적 기본기가 없는 상태에서


<순수이성비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신현상학> 같은 원전을 읽는 것입니다.


읽다가 포기할 가능성이 높고, 읽더라도 잘못 읽을 겁니다.






그러면, 저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공부하면 좋을까요?


당연하게도 대학교 수업을 듣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결국 원전을 읽긴 해야 하는데,


교수님의 도움 없이 원전을 올바르게 독해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경제학과를 가서 공부해야 하고


공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공학계열로 진학해야 하는 것처럼


철학도 제대로 공부하려면 사실 대학에서 배우는 편이 제일 좋습니다.





그럼에도 혼자 힘으로 원전을 읽어야 한다면,


데카르트의 <성찰>부터 시작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철학 원전 치고는 어렵지 않은 편이고, 이 책을 읽으며 철학이 다루는 주제가 무엇인지,


나는 어떤 주제에 관심있는지를 알아 볼 수 있을 겁니다.




이외에도 저명한 교수님들의 인터넷 무료 강의나,


'스탠포드 철학 백과사전', '전기가오리' 등의 좋은 매체들이 많으니


이를 충분히 활용하여 공부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박사도 석사도 심지어 아직 학사도 아니지만


그래도 철학을 열심히 공부했었고, 


철학 공부를 시작하려는 다른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적어봤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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