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anus [1240668] · MS 2023 · 쪽지

2023-11-24 21:21:23
조회수 2,367

네가 하는 일이 망해도 너는 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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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올해의 도전이었던 저의 연세대학교 수시모집 논술전형 최종 불합격 소식을 전하며 글을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네, 쓰겠다던 학교별 인문논술 칼럼이나 최초합격자 발표가 있었던 17일 이후 연논 관련 글이 올라오지 않는 걸 보시고 눈치채신 분들도 꽤 있었을 것 같습니다. 불합격 결과를 통보받고 나니, 솔직히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져서 어쩔 수 없었네요─라고 건조한 변명을 남겨봅니다. 그럼에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제 말은 여전히 유효하기에, 여러분들은 끝까지 열심히 달려오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저는 학적 변경에 실패했고, 지금의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하는 입장이기에 별다른 변화 없이 일정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친구, 지인들은 며칠 전까지도 입시를 한 경우가 많고, 저도 시간을 내서 최대한 많이 만나고 있습니다.

꿈에 그리던 최고의 대학, 원하던 학과에 안정적으로 합격할 수 있는 성적을 따낸 친구는 거의 없지만, 다들 나름대로 ─본인들이 생각했을 때─ '진학할 가치는 있는' 학교에 붙을 정도의 성적은 얻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뭐, 솔직히 말하면 "? 네가?" 싶은 경우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붙을 만 하니까 붙었겠거니, 하고 받아들여야겠지요. 

작년에는 쓸 수 있는 만큼도 다 쓰지 못하고 떨어진 데 반해 올해는 100%로 쓰고 나와서 떨어졌으니 진짜 제 능력은 딱, 여기까지라는 의미겠죠. 내가 나의 노력에 떳떳했던 만큼 패배를 깔끔히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작년에 저의 합격으로 누군가는 지금의 저와 같은 결과를 받아들었을 테니까요. 물론 내가 자신있는 분야에서 누군가에게 밀린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참으로 힘듭니다. 나는 모르는 누군가가, 어쩌면 잘 아는 누군가가 나보다 월등히 뛰어다나는 사실이 참, 이게 참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요. 

아마 다양한 모티베이션들이 있겠습니다만, 저의 경우 공부를 했던 이유는 80% 이상 열등감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꼭 성적으로 이겨보고 싶었던 친구 하나를 바라보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결국 졸업할 때까지 3년, 12번의 중간기말 중간기말 국영수사과역 그 어떤 과목에서도 단 한 번을 못 이기고 중학교를 떠났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중학교 시절 공부했던 것들은 좋은 토대가 되어 주었고, 고등학교 공부도 잘 따라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 이후로 전 철저히 열등감에 반응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내 분야에서 잘하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만 성취하고 노력하려는 그런 사람이요. 

이런 열등감은 한계가 참 명확합니다. 우리는 결국 언젠가 멈춰선다는 것이죠. 처음엔 이만한 동기부여가 없다고 느낍니다. 내가 최고가 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만 같거든요. 그런데 과연 그게 영원할까요. 다니던 지역 중학교 전교 1등을 차지하고 서울권 전사고에 진학했다 칩시다. 분명 그 레벨에서 막히는 수가 대부분이겠지만 뭐, 멈추지 않은 누군가가 있다고 가정해보죠. 그 다음은 이제 대학을 가야겠죠? 메디컬 메디컬 하니까 또 메디컬을 갑니다. 의대, 그것도 서울대 의대가 최고의 낭만이니까 서울대 의대를 가기로 합니다. 전국 135명 내외만이 설의에 갈 수 있고, 거기서 또다시 경쟁을 해야 할 겁니다.



나보다 잘하는 누군가를 따라가려고 해서는 끝이 없더라구요. 언젠가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날거고 언젠가 멈춰서게 될 겁니다. 더 올라가지 못할 거에요. 그럼 그 때는 그대로 쓰러질 건가요. 

연세대를 또 떨어지고, 주변에 삼반수 선언을 하는 친구들을 보며 한 번 더를 고민하는 저에게, 그리고 아직도 오르비를 서성거리는 미련 한가득 남은 여러분에게 해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고생이 많습니다. 실패를 겪어도 겪어도 매번 배우는 건 그저 열심히 한다고 다 잘 되는 것은 아니라는 빛바랜 아픈 문장 하나 뿐인 것만 같아요. 그러니, 절대로 절대로 고집부리지 말고, 이쯤 됐다 싶으면 빨리 벗어납시다. 짖는 개를 볼 때마다 멈추면 원하는 데까지 못 갑니다.

제가 감히 이런 말을 입에 담아도 될지 모르겠지만, 수능이 정말 전부가 아니에요. 올 한 해, 집 근처에서는 수많은 재수생들과, 신촌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대학생들 딱 두 부류의 동갑내기들과만 교류하며 느낀 바입니다. 대학에 가면 지금과는 많이 다른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될 거고, 바뀌는 게 많을 겁니다. 아무도 내년 한 해에 다시 대입에 도전하는 것이 대학을 다니는 것보다 인생을 더 빛나게 해줄 거라고 장담해주지 못할 테니까요. 올해로 N번째 도전을 하신 분들이라면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열정을 쏟고 시간을 쏟을 일들은 대학에 가도 많이 있어요.─듣기도 많이 들었고...─ 그러니 후회없도록 현명한 선택들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선택을 하건 여러분의 삶에서는 여러분의 선택만이 늘 정답이니까요. 응원하겠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가 패배의 슬픔에 잠겨 있는 동안에 DM으로 논술 관련 질문을 주셨던 수많은 분들, 저도 그 마음을 알기에 학교 오가는 지하철에서도 열심히 글을 적어 회신드렸습니다. 부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학원에서 일을 하고, 수험생들 공부 봐주는 일도 계속할 예정이라 아마 오르비도 계속... 오지 않을까요. 이듬해에는 나름 자신있는 국어, 생윤, 사문과 전반적인 수험생활 루틴관리, 멘탈관리 등등 해서 칼럼이라도 열심히 적어보겠습니다. 꼭 논술도...  



얼마 전에 저희 학교에서도 논술고사가 있었습니다. 외부인들 온다고 사단장 부대방문 앞둔 군인들마냥 바닥 광 나게 닦고 해서 건물이 많이 깔끔해졌더라구요. 예쁜 휘장도 달리고요. 찬바람 맞는 걸 좋아해 자주 학교를 걷는데 요 며칠 캠퍼스가 참 예뻤습니다. 입시도 다 끝나고 이제는 전처럼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춥긴 하지만 어디 놀러 가기엔 이만한 낭만의 계절이 없거든요,,, 

부디 건강하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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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ooooooo · 1175299 · 23/11/24 21:27 · MS 2022

  • 바움쿠헨 · 879881 · 23/11/25 22:35 · MS 2019 (수정됨)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 선택하시는 길 잘 풀리시길 바라겠습니다. 응원합니다.
  • Arcanus · 1240668 · 23/11/26 04:15 · MS 2023

    감사합니다. 선배님(?)도 꼭 행복하시길.

  • mingmingg · 1243888 · 23/11/26 00:31 · MS 2023

    올해 서강대 논술을 치고 간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는 중입니다(후배가 되고 싶네요ㅎ ㅠㅠ ) 올 한해 수고 많으셨고 응원하겠습니다 화이팅!

  • Arcanus · 1240668 · 23/11/26 04:16 · MS 2023

    찬바람도 쌩쌩 불던 날에 애쓰셨습니다. 꼭 좋은 결과 있을 거에요. 발표 전까지는 입시 하나만을 보고 달려온 자신을 많이 아껴주고 보듬어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