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과 위악 [728914] · MS 2017 · 쪽지

2023-09-28 10: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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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의 자전을 관측을 통해 처음으로 밝힌 게 한국 주도라고라? -m87은하 블랙홀 자전 보도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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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녁, 영국 언론 가디언을 보니 ‘블랙홀의 자전을 관측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했다’는 보도가 눈에 띄었습니다. 


https://www.theguardian.com/science/2023/sep/27/first-evidence-of-spinning-black-hole-detected-by-scientists


읽어보니


 1. 지구로부터 5500만 광년 떨어진 m87 은하에는 태양보다 65억배(원문에 ‘billion’으로 돼 있는데, 이게 ‘전통 영국식 영어’에서 말하는 ‘1조’는 아니겠죠?) 큰 블랙홀이 있는데, 전 세계 전파 망원경을 연동해서 관측한 결과, 이 블랙홀은 자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론 물리학에서는 이를 이미 예측했다.


 2. 이 블랙홀의 자전은 다음과 같은 관측에 따른 ‘추론’으로 이뤄졌다.(블랙홀 자체의 자전은 ‘아직은’ 관측 불가이므로!) 즉, 이 블랙홀의 양극 지점에서는 빛의 속도와 맞먹는 속도(빛 속도의 99.99%)로 가스와 먼지가 분출된다. 이 가스와 먼지의 분출 양태를 보면, 돌고 있는 팽이처럼 궤적이 움직인다.(세차운동. precession) 그 주기는 11년이었다. 이는 블랙홀이 자전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이 해석, 맞나요? 가디언 보도에서 제가 ‘오역’을 한 게 있다면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저의 짧은 지식으로는, ‘만물은 움직인다’는 것 외의 의미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블랙홀도 축을 중심으로 자전한다는 등의 ‘귀중한 물리학적 사실’을 밝히기는 했지만) 이제는 클리쉐에 가까운 표현이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법’입니다. 


 혹시 우리 언론 보도에서는 그 의미를 나 같은 무식한 놈을 위해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을까?


 거의 전 언론에서 보도했더군요. 물론 제가 찾고자 하는 ‘의미’를 설명한 것은 없었습니다.


 한데, 보도에서 ‘직감적으로, 아니 본능적으로 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연구팀이 주도했다(이끌었다)’는 서술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보도 말입니다.


https://www.ytn.co.kr/_ln/0105_202309280535556451


기자 생활을, 그것도 ‘국수성’이 강한 문화재 기자를 20년 가까이 하면서, 저 역시 이런 식의 보도를 한 적이 많았으니까. 한데, 인터넷으로 외국 언론 보도를 살피면 ‘중국 학자가 주도했다’고는 해도, 한국 학자가 주도했다는 내용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럴 때는 논문 저자의 등재 순서를 보면 됩니다. 그래서 본 연구 결과를 게재한 ‘네이춰’를 확인했습니다. 


 https://www.nature.com/articles/s41586-023-06479-6


모두 77명의 저자 이름을 적었더군요. (마지막에는 두 명의 이름을 ‘한 명’인 양 ‘&’로 함께 표기했습니다. 두 사람을 공저자로 각각 친다면, 모두 78명입니다.)


 ‘Yuzhu Cui’라는 중국인 이름이 제 1 저자로 올랐고, 한국인 이름은 일곱 번째에 처음으로 있었습니다.(‘Hyunwook Ro’로, 한국천문연구원 소속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그냥 ‘한국 학자도 참여한 국제공동연구팀’이라고 했으면 될 터인데. (사족 하나. 이것이 기자들의 잘못일까요? 보도자료, 혹은 우리 연구진의 설명 자체가 그렇지 않았을까요?)


 10대 이후 제가 가진 가장 큰 지적 문제의식은 ‘우리가 가진 근대성 콤플렉스’였습니다. 20세기에 강점을 경험한 탓인지, 우리 것을 과장하고 미화하려는 태도가 우리에게는 너무도 강합니다.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도 그렇고,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4강 국가였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식의 서술도 마찬가지입니다. 팩트를 치밀하게 살피면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저는 봅니다. 그냥 우리의 역량을 현실 그대로 기술하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자생적 근대화가 안 돼서 강점을 경험했다’는 콤플렉스의 반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너무도 아쉽습니다. 


50대 최후반에 이른 지금도 저를 가슴 뛰게 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진리는 나의 빛’. 기자 생활을 하면서 더해진 것은 ‘사실(fact)이 너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었지요.


추신


 덜떨어진 인문학 전공자로서 기사를 보면서 느낀 것. 만물은 움직인다(그것이 자전이든 공전이든)는 점. 개인 역시 사실과 진실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 20대 때 배운 알량하고도 구태의연한 지식에 평생 기댄 채, 세상의 변화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구세대는 어쩌면 시효가 다 됐을지 모른다는 것. 제가, 저를 포함해서 구태에 찌든 586을 혐오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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